천주현 변호사
대한변호사협회 이사
형사법 박사, 대구·경북경찰청 수사위원
(제19회 우수변호사상 수상, 제61회 법의 날 표창 수상)
봄날의 여행을 꿈꾸다
어느 화창한 봄날. 영숙(가명)과 병주(가명)는 오랜만에 설레는 여행을 계획했다.
자녀들이 독립한 뒤 처음으로 떠나는 여행에 부부의 마음은 봄바람에 살랑이는 꽃잎처럼 흔들렸다.
따뜻한 남쪽으로 여행을 떠나기로 한 영숙과 병주는 자녀인 명진(가명)에게
이 사실을 전했다.
“엄마, 장거리 운전은 오랜만이시잖아요? 사전에 점검하고 출발하시는 게 좋을 거 같아요.”
그 길로 명진은 자동차 정비업체를 찾았다.
“오랜만에 장거리 운행을 할 예정이라서요. 사전에 점검 좀 하려고 합니다.”
“네, 고객님. 내일까지 정비 마쳐서 인도해 드리겠습니다.”
명진은 부모님의 여행길이 더 쾌적하길 바라며 기분 좋게 발걸음을 돌렸다.
다음날, 정비를 마친 자동차가 부부의 집에 도착했다. 다행히 별다른 이상은 없다고 하니 마음도 한결 가벼웠다.
“이제 다 준비됐네! 내일 아침에 일찍 출발할 거니까 오늘은 일찍 잠자리에 듭시다.”
“그래요. 나는 빠뜨린 거 없나 확인만 하고 갈게요. 먼저 자요.”
설레는 여행 전날 밤은 그렇게 저물어 갔다.
마지막이 된 여행길
드디어 여행 당일 날이 밝았다. 간식과 가벼운 짐을 챙긴 부부는 자동차에 연료까지 가득 채우고 여행길에 올랐다.
창밖에 펼쳐진 풍경까지 완벽한 날이었다.
운전대를 잡은 영숙은 고속도로로 진입했다.
그때였다.
“어? 이게 왜 이러지?”
뭔가 이상함을 감지한 영숙이 급하게 비상등을 켜고 자동차를 갓길 쪽으로 빼기 시작했다.
“왜 그래?”
“모르겠어요. 브레이크가 안 듣고, 차가 갑자기 빨라져요!”
쾅-!
갓길 위에서 빠르게 달리던 부부의 차는 결국 속도를 줄이지 못하고 보호 난간에 부딪힌 뒤에야 멈췄다.
갑작스러운 사고 소식은 가족들에게도 빠르게 전해졌다. 명진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
이미 부모님은 생을 마감한 뒤였다. 명진을 포함한 형제들에겐 부모님과의 작별 인사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이대로 있을 순 없어!”
명진은 과태료 한 번 내지 않고 안전운전을 해 오던 부모님이 이런 사고를 일으켰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블랙박스를 확인해 봐도 급발진이 의심되는 상황이었다.
“명백한 급발진 사고잖아. 사전 점검까지 받았는데 왜 이런 일이 생긴 거냐고!”
명진과 형제들의 슬픔은 자동차 제조사와 정비업체를 향한 분노로 바뀌어 갔다.
결국 명진은 자동차 제조사와 정비업체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개인의 힘으로 큰 회사들을 상대하기란 쉽지 않았다.
1심 소송에서 법원은 ‘제조물을 정상적으로 사용하던 중 사고가 났다고 단정할 수 없다’라며 제조사를 면책, 또 ‘정비과실이 없다’라며 정비업자들도 면책시켰다.
부모님께 전하는 소식
“말도 안 돼!”
차량 결함이나 정비 소홀을 밝히지 않고는 자식으로서 부모님 산소도 갈 수 없었다.
제조사와 정비소는 계속해서 잘못이 없다고만 하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결국 항소를 하기로 한 명진은 비장한 마음으로 2심 재판을 준비했다.
“사고를 피하려고 갓길로 주행한 데다 비상등을 켜서 이상이 있다는 걸 계속해서 알렸는데 이게 어떻게 개인의 운전 미숙이라고 할 수 있겠냐는 거야.
2심에서는 분명 이 사실을 알아줄 거야.”
2심 판결 당일. 명진의 가족은 모두 법원으로 향했다.
명진은 혹시라도 1심과 같은 판결이 나오면 어쩌나 하는 긴장감과 일말의 가능성에 희망을 걸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지난한 공방이 이어졌다. 준비한 증거 자료와 서류를 검토하며 판사들도 치열하게 사실을 확인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감정인도 두 명이나 투입됐다. 차량과 사고를 제대로 감정하는 일이 이런 사망사고에서는 중요하다고, 판사도 말했다.
드디어 판결의 시간, 판사는 천천히 판결문을 읽어 내려갔다.
“그간의 증거에다가 이 법원의 감정인 2인에 대한 각 감정결과와 변론 전 취지를 종합헤 보면, 이 사건 사고는 운전자가 자동차를 정상적으로 운행하던 중 자동차 제조업자의 배타적 지배하에 있는 영역에서 발생한 것이다.
따라서 자동차 결함으로 인한 사고라고 판단된다.” 판사는 결론부터 명쾌히 말하고, 그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자동차와 같이 고도의 기술이 집약돼 대량으로 생산되는 제품의 결함을 이유로 제조업자에게 손해배상책임을 지우는 경우,
그 제품의 생산과정은 전문가인 제조업자만 알 수 있으므로 어떤 결함이 존재했고, 그 결함으로 인한 손해 여부를 일반인이 밝히긴 어렵다.
따라서 소비자 측에서 그 사고가 제조업자의 배타적인 지배하에 있는 영역에서 발생했다는 점과 그 사고가 어떤 자의 과실 없이는
통상 발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하면 제조업자 측에서 제품 결함이 아닌 다른 원인을 입증하지 못하는 이상 결함으로 인해
사고가 발생했다고 추정해 손해배상책임을 지울 수 있다.
결국 이 사건은 자동차의 결함으로 인한 사고라고 판단되므로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제조사는 이 사고에 대한 손해배상책임을 진다.”
판사는 말을 이어 갔다.
“피고 측은 운전자가 브레이크 페달을 오인해 가속 페달을 밟은 것으로 주장했지만 사건의 자동차가 비상 경고등이 작동된 채로 300m 이상의
거리를 갓길로 진행하고 있었던 사정에 비추어 볼 때 고속 주행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운전자가 정상적인 운행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는 점 및
위와 같은 고속에서 운전자가 조향장치를 작동시키는 것이 경험칙*상 가능하다고 단정하기 어렵고, 차량 엔진 상의 결함이 있을 때 브레이크 페달이
딱딱해질 가능성도 있는 점 등에 비추어 보면, 브레이크 등의 미작동만으로는 운전자가 브레이크 페달을 밟으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고 단정하기도 어렵다.
이에 자동차 제조업자인 피고는 원고에게 손해배상금을 지급하라. ”
탕탕탕-
판결문을 들은 명진과 가족들은 그 자리에서 서로의 손을 잡았다. 비록 판사가 정비업자들의 과실까지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부모님의 사망 원인이 차량결함 때문인 것이 밝혀진 것만 해도 속이 후련했다.
“우리 부모님께 인사드리러 가자.”
“그래, 이제야 얼굴 들고 뵈러 갈 수 있겠어.”
* 경험칙이란 사실판단의 법칙, 즉 구체적 사실이 아닌 사실판단의 전제로서 기능하는 법칙이다.
이 이야기는 고속도로에서 사고로 생명을 잃은 부부의 자녀들이 급발진 사고를 주장하며
제조사에 손해배상을 청구한 사건을 재구성한 내용입니다.
서울중앙지방법원 2020.8.11. 선고 2019나54506 손해배상(기) 판결
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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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1심판결(2018가단5211948) 중 아래에서 지급을 명하는 금액에 해당하는 원고들 패소 부분을 취소한다.
피고 C 주식회사는 원고들에게 각 4천만 원 및 위 각 금원에 대하여 2018. 5. 4.부터 2020. 8. 11.까지는 연 5%,
그 다음 날부터 다 갚는 날까지는 연 12%의 각 비율에 의한 돈을 지급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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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원고들의 나머지 항소를 기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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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소송 총비용은 피고 C 주식회사가 부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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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제1항의 금전 지급 부분은 가집행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