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9+10 Vol.83
역사를 따라간 길 역사를 따라간 길

동학농민혁명과 녹두로

지난해 ‘동학농민혁명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동학농민혁명을 민족·민중 항쟁으로 승화시킨 가치와 정신을 살펴보기 위해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에 있는 ‘녹두로’로 떠나 본다.

글. 정자은
자료 출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외 다수
사진제공. 동학농민혁명기념관

동학농민혁명기념관 전경 ⓒ동학농민혁명기념관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은 농민들의 외침

어린이전시실 ⓒ동학농민혁명기념관 동학농민혁명은 1894년 반봉건·반외세를 기치로 동학교도 전봉준과 농민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초기에는 동학난, 동비의 난으로 불리다, 1910년 대한제국 멸망 이후 농민운동, 농민혁명으로 격상됐다. 갑오년 농민들이 궐기해 부정과 외세에 항거한 운동으로 ‘갑오농민전쟁’이라고도 부른다. 1894년 3월 봉건체제 개혁을 위해 1차로 봉기, 같은 해 9월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고자 2차로 봉기한 항일무장투쟁이다.

이 혁명의 배경은 살기 힘든 현실에서 비롯됐다. 개항 이후 물가는 오르고 지방 관리의 횡포는 계속됐다. 삶이 고단해진 백성은 동학(東學)에 의지했고, 농촌을 중심으로 동학이 퍼져 나간 것이다. 동학은 1860년 최제우가 창시한 종교다. ‘서학(西學)’이라 불리던 천주교에 맞서는 새로운 가르침으로 동학을 만들었다. 동학은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사상을 지녔기에, 백성은 힘든 현실을 견디고자 자연스럽게 동학에 빠져들었다.

동학농민혁명은 실패로 막을 내렸지만, 역사적 가치를 지녔다고 평가받는다. 내부적으로는 갑오개혁을, 외부적으로는 청·일전쟁의 시발점, 이후 1919년 3·1운동에도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안으로는 봉건적인 지배 체제에 반대해 노비 문서 소각과 토지의 평균 분작 등의 개혁 정치를 요구했다. 밖으로는 외세의 침략을 물리치려 했다. 이런 동학은 당시 집권 세력과 일본 침략 세력에 의해 탄압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기획전시실 ⓒ동학농민혁명기념관 상설전시실 ⓒ동학농민혁명기념관

동학농민혁명의 발상지 ‘무장읍성’

전라도는 조선의 대표적 곡창지대였기에, 국가재정도 이 지역에 크게 의존했다. 백성은 조선 전시대에 걸쳐 수탈의 대상이 됐고, 이는 봉기로 이어졌다. 동학농민혁명의 발상지인 ‘무장읍성’은 녹두로에 위치한다. 무장읍성은 조선 태조 때 잦은 왜구의 침입을 방어하고자 만들어졌다. 1.4㎞ 둘레의 읍성으로 진무루 주변의 석축 성곽을 제외하면 대부분 흙으로 다져진 토성이다.

지금도 조선 시대 때 객사와 동헌 등의 시설물이 무장초등학교 주변에 남아 있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고부 봉기로 군수 조병갑을 몰아냈고, 해산 후 보복하듯이 관군들의 횡포가 이어졌다. 이에 정읍과 부안, 고창 일대의 농민군과 동학세력이 무장읍성에 모여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한 거사를 시작했다. 무장읍성 외에 ‘고창 무장기포지’도 동학농민혁명의 시발점으로 의미가 큰 유적지이다. 고창군에서 대산면으로 가는 국도 22호선 왼쪽 구수마을 일대에 위치한다. 참고로 ‘무장’은 지명이며 ‘기포지’는 동학농민혁명 포고문을 선포한 집결지를 의미한다.

동학농민혁명의 발상지 무장읍성 일대가 현재 ‘녹두로’라는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다. 녹두로는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무장면 행정복지센터 교차로에서 고창군 고창읍 읍내삼거리를 잇는 도로이다. 녹두장군 전봉준을 기리는 전봉준로도 있다.

고창 지역은 동학농민혁명의 전국적 전개를 알리는 무장기포가 일어났으며 혁명의 발상지다. 또 당시 농민군 내부에서 중심적인 활동을 한 전봉준의 태생지였다. 동학농민혁명의 발상지인 고창 녹두로를 통해 우리나라 최초의 민권운동이자 혁명의 의미를 되새겨 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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