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9+10 Vol.83
죄와 벌 죄와 벌

사고 후 조치 의무

정(情)과 정(正) 사이에서

교통사고 후 사고 피해자가 그냥 가도 된다는 말을 믿고 현장을 떠나도 괜찮을까?
사고 현장에서 올바른 대처 방법을 알지 못했던 A씨의 사례를 통해 알아본다.

글 · 그림. 차은서
감수. 천주현(형사전문 변호사)

천주현 변호사
대한변호사협회 이사
(제19회 우수변호사상 수상),
대구경찰청·경북경찰청 수사위원, 형사법 박사

한국인의 정(情)

“택배입니다.”
아침에 입고 나온 옷은 이미 땀에 흠뻑 젖었다가 마르길 여러 번. 무거운 몸이 피로 때문인지 옷에 더해진 소금기 때문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오늘 할당량을 모두 채우고 나니 시계 바늘은 벌써 밤 10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어이쿠, 서둘러야지.”
영준은 급하게 물류센터로 향했다. 온종일 함께했던 화물차를 반납한 후 주차장에 세워 둔 승용차를 타고 드디어 집으로 가는 길. 영준은 밀려오는 피로를 애써 모른척하며 빨리 집에 도착하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드디어 익숙한 삼거리에 다다랐다.
“차도 별로 안 다니는데 뭐.”
비보호 좌회전 차로에서 빨간색 신호등을 바라보던 영준은 큰 고민 없이 좌회전을 시도했다.

쾅-
순식간에 사건은 벌어지고 말았다.
신호에 맞춰 진행하던 자동차를 보지 못한 영준의 차가 그대로 직진하는 차를 박아버린 것이다.

“큰일이다!”
놀란 영준은 얼른 차에서 내려 상대 운전자에게 사과의 말을 전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차를 보지 못했습니다. 다친 곳은 없으세요?”
그때 자동차 뒷문이 열리더니 중년의 남성이 내렸다. 술에 조금 취한 모습이었다.
‘술을 먹어서 대리를 부른 거구나.’ 영준은 순간적으로 생각했다.

“아, 알아서 할 테니 그만 가세요.”
손을 휘이 저으며 그만 가보라는 그의 행동이 조금 의아했지만 영준은 이것도 한국인의 정이라는 생각에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그래도 될까요?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다행히 다친 곳도 없어 보이고, 자동차도 크게 훼손돼 보이진 않았다. 물론 보험처리를 하면 될 것 같았지만 그냥 가보라고 하니 하늘이 도왔다는 생각밖엔 들지 않았다.
사건은 그렇게 마무리되는 듯 보였다.

뺑소니라니!

일주일 뒤, 영준은 뜻밖의 연락을 받았다.
“여보세요? 여기 ○○ 경찰서입니다. 김영준 씨 되시나요?”
“네 맞는데, 무슨 일이시죠?”
“김영준 씨 얼마 전에 교통사고 낸 적 있으시죠? 뺑소니 사건으로 접수돼서 출석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수화기 너머 경찰관의 목소리는 친절했지만 단호했다. 평생 경찰서라곤 가본 적도 없는데 갑자기 뺑소니라니, 영준은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네?! 뺑소니라뇨. 그때 분명히 내려서 차주분하고 대화도 나눴습니다. 그냥 알아서 하신다고 해서 갔을 뿐이라고요!”
“네네, 경찰서에 나오셔서 말씀해 주세요.”
뚝-

망연자실한 마음을 뒤로하고 영준은 경찰서에서 상황을 다시 전해 들었다.
그날 사고 후 인적 사항을 남기지 않고 도주한 데다 당시 그냥 가라고 한 차주가 다쳤다며 고소했다는 것이었다.
영준이 그날의 상황을 아무리 설명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결국 영준은 소송을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정인 줄 알았는데

드디어 사건 판결이 있는 날. 영준은 마지막 희망을 붙잡는 심정으로 법정에 섰다.
판사와 배심원 앞에서 영준은 자신의 입장을 필사적으로 피력했다.
무거운 법정 분위기에 짓눌려 갈 때쯤, 드디어 판결문이 나왔다.

“삼거리 교차로에서 좌회전하던 피고인은 신호에 따라 직진하던 피해자의 승용차의 좌측 앞부분과 피고인의 승용차 우측이 부딪히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이 사고로 피해자 소유의 승용차 수리비 1백만 원 상당이 들도록 손괴됐음에도 피고인은 잠시 정차해 피해 차량의 상태를 확인했을 뿐, 교통상의 위험과 장해를 방지·제거하기 위한 조치를 하거나 피해자 측에게 인적 사항을 제공하지 않고 사고 현장을 떠났습니다. 이로써 피고인은 교통사고 발생 시 필요한 조치를 다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배심원 의견도 만장일치로 유죄라는 평결이 나와 유죄로 인정하기 충분합니다.” 판결문은 이어졌다.
“한편, 피고인은 운전 업무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안전하게 운전해 사고를 방지해야 할 업무상 주의의무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를 게을리한 채 이번 교통사고를 일으켜 업무상 과실이 인정됩니다. 하지만 피해자의 상해 정도가 심하지 않은 점, 상해와 사고의 연관성을 인정할만한 증거가 부족한 점 등 피해자를 상해에 이르게 한 뒤 구호조치를 하지 않고 도주한 점은 인정하기 어렵습니다. 이에 피고인을 벌금 200만 원에 처합니다.”

무죄를 주장하던 영준에게는 뼈아픈 판결이었다.
사고후미조치라는 물적 뺑소니는 유죄가 나왔고, 도주치상죄라는 인적 뺑소니는 무죄가 나온 것이, 영준은 잘 이해되지 않았다. 하나의 행위인데 뺑소니가 된 것도 있고 아니라는 것도 있어서였다. 하지만 이미 결과는 나왔고 영준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한국인의 정인 줄만 알았는데···. 내가 정에 기대다가 정도를 벗어났구나.” 영준은 안일하게 대처했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심지어 중간에 합의를 하지 않으면 더 높은 수위의 처벌을 받을 수도 있었다니 등골이 오싹해지기까지 했다. 또한 영준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운전대를 잡는 사람은 모두 법률적으로 운전업무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는 사실까지 새롭게 알게 됐다.

이 이야기는 교통사고 후 조치를 다하지 않고 현장을 떠난 A씨의 사건을 재구성한 내용입니다. 광주지방법원 2021. 3. 29. 선고 2020고합257 판결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도주치상), 도로교통법위반(사고후미조치)]
주문: 피고인을 벌금 200만 원에 처한다. 피고인이 위 벌금을 납입하지 아니하는 경우 10만 원을 1일로 환산한 기간 피고인을 노역장에 유치한다. 위 벌금에 상당한 금액의 가납을 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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