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죄와 벌
백색 실선 너머의 후회
만약 운전 중 나의 과실로 다른 자동차가 사고를 낸다면? 내 차와 충돌이 없었으니 그냥 무시하고 가도 괜찮은 걸까? 차로 변경이 불가능한 백색 실선을 넘는 바람에 뒤차 사고를 유발한 A씨의 실제 사연을 통해 알아보자.
글·그림. 차은서 감수. 천주현(형사 전문 변호사)
만약 운전 중 나의 과실로 다른 자동차가 사고를 낸다면? 내 차와 충돌이 없었으니 그냥 무시하고 가도 괜찮은 걸까? 차로 변경이 불가능한 백색 실선을 넘는 바람에 뒤차 사고를 유발한 A씨의 실제 사연을 통해 알아보자.
글·그림. 차은서 감수. 천주현(형사 전문 변호사)
대한변호사협회 이사
형사법 박사, 대구고등검찰청·대구경북경찰청 수사위원
(제19회 우수변호사상 수상, 제61회 법의 날 표창 수상)
뜨거운 태양이 붉은빛을 길게 늘어뜨리며 넘어가고 있었다.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해야 할텐데···”
지민은 집에서 해야 할 일을 떠올리며 조바심이 났다.
어느 누구도 재촉하지 않았지만 빨리 하루를 마무리하고 편안한 저녁을 보내고 싶었던 탓이다.
“내일 먹을 음식도 미리 만들어 두고··· 아, 맞다. 오늘은 배수구도 청소해야지···”
지민의 몸은 운전대를 잡고 있었지만 머릿속으로는 온통 회사 일을 핑계로 미뤄 둔 집안일 생각 뿐이었다.
“앗! 지하도로 타야 하는데!”
그 순간 차로를 잘못 든 지민은 급하게 운전대를 돌려 지하도로로 이어진 차로로 향했다.
이미 지하도로 입구와 가까워져 차선은 실선이었지만 지민은 개의치 않았다.
‘끼이이익— 쿵!’
그때, 뒤쪽에서 갑자기 큰 소리가 났다.
뒤따라오던 운전자, 하준이었다.
갑자기 끼어든 지민의 차에 놀라 운전대를 꺾다가 그대로 다른 차와 충돌한 것이다.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하준은 급하게 차에서 내려 지민의 차를 향해 달려갔다.
“저기요! 갑자기 끼어들면 어떡합니까? 그쪽 때문에 사고가 났잖아요!”
“네? 그게 왜 제 책임이에요. 저랑 부딪치셨어요? 앞을 잘 보셨어야죠!”
괜한 항의를 한다고 생각한 지민은, 그대로 사고 현장을 떠났다.
분노한 하준은 휴대전화를 들어 멀어져 가는 지민의 자동차 번호판을 촬영했다.
사고를 수습하면서도 하준의 분노는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전방주시를 하지 않아 생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더욱 그랬다.
‘따르르릉--’
며칠 후, 평범했던 지민의 일상을 깨는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지난번 백색실선을 넘어 사고를 유발한 것으로 조사를 받으러 나오라는 경찰의 안내 전화였다.
지민은 당황했다.
“제가 부딪친 것도 아닌데 제가 그 사고랑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네요.
그 사람이 전방 주시를 안 한 거겠죠!”
“자세한 내용은 서에서 이야기해 주시죠.”
할 수 없이 경찰서에 간 지민은 더 황당한 이야길 듣게 됐다.
해당 사건의 가해자임에도 피해자 구호 조치를 하지 않은 채 도주한 혐의를 받고 있단 것이었다.
이미 피의자로 입건돼 조사가 진행됐고 사실 여부에 따라서 법원의 판결이 나올 거라는 안내도 함께.
“이런 법이 어딨어요? 사고는 뒤차가 냈는데 왜 제가 가해자인 거죠?”
“백색실선에서는 차로변경이 금지되는 거 모르세요? 본인 과실로 뒤차들이 예상치 못한 사고를 당한 상황입니다.
블랙박스 영상이랑 진술도 전부 확인했어요. 증거 자료 있으시면 제출하세요.”
결국 재판이 열렸다. 지민은 조마조마하게 판결 선고를 청취했다.
“징역 1년 2월, 집행유예 3년?! 내가 유죄라고? 말도 안 돼! 내가 왜 과실이
있다는 거야? 항소하겠어!”
드디어 항소심이 열리는 날, 지민은 오늘이야말로 자신의 억울함을 알리겠다는 각오로 법정에 들어섰다.
숨을 깊게 들이쉬고 법정에 섰다.
“피고인?”
판사의 낮고 단호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네!”
지민은 또렷하게 대답했다.
“할 말 있습니까?”
판사가 물었다.
지민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전 정말 억울합니다. 그날 사고가 난 건 맞지만, 전 그 차랑 부딪치지도 않았고, 누구 하나 다친 줄도 몰랐어요.
백색실선이라고 해도 그렇게 심각한 줄 몰랐고요.
그냥··· 저는 제 갈 길 간 것뿐인데, 1심 판단이 저로선 너무 억울해요.
이해도 안 돼요.
판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좋습니다. 사건의 경위부터 간단히 짚고 가겠습니다.”
그는 재판 기록을 한 장 넘기고 말을 이었다.
“이 사고는, 피고인이 백색실선이 그어진 도로에서 진로를 변경하면서 발생했습니다.
그게 어떤 의미냐면요, 그 실선은 차선을 바꾸지 말라는 ‘안전 표지’입니다.
그런데 피고인은 그걸 무시하고 갑자기 끼어들었어요.
그래서 뒤따르던 차량이 피하려다가 다른 차와 부딪혔죠. 그게 문제입니다.”
지민은 여전히 납득하기 어렵다는 표정이었다.
판사는 시선을 잠시 내려 판결문을 꺼내들었다.
“원심이 적법하게 채택·조사한 증거들에 의하여 인정되는 아래와 같은 사정들을,
관련 법리에 비추어 보면, 이 사고는 피고인의 과실로 인해 발생한 것으로 인정됩니다.
그러한 피고인이 미필적으로나마 본인의 잘못으로 사고가 발생했을 가능성을 인식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차하거나 피해자 상태를 확인하는 등의 조치를 하지 않고 현장을 이탈했습니다.
이러한 행위는 ‘도주의 의사’가 있었다고 판단되며, 피고인의 항소 주장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말은 지민의 머릿속에 또렷이 박혔다.
“피고인의 항소를 기각한다. 피고인에게 징역 1년 2월에 처하되,
이를 3년간 집행유예한다는 원심의 판결을 유지한다.”
판사의 망치 소리가 법정 안에 울렸다.
지민은 그 자리에 선 채,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누구도 다치지 않았다고 믿고 싶었던 그날,
사고의 책임은 결국 ‘지키지 않은 자’의 몫이었다.
위 사건은 백색실선이 설치된 도로에서 갑자기 차선 변경을 해 사고를 유발한 A씨가 그 사고로 사람들이 다쳤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무 조치 없이 현장을 떠나 ‘도주치상’ 혐의가 인정된 사례를 각색한 내용입니다.
인천지방법원 2022. 11. 25. 선고 2021노3952 판결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도주치상), 도로교통법위반(사고후미조치)]
주문
피고인의 항소를 기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