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 북마리아나 제도에는 15개의 섬이 있다. 그중 사이판은 북마리아나 제도의 관문이자 대표 섬이다. 섬 크기를 가늠할 때 우리는 흔히 제주도와 비교하곤 하는데 사이판은 제주도의 10분의 1 정도 크기다. 남북 길이 약 21km, 동서 길이 3~8km, 사이판 북쪽 끝에서 남쪽 끝까지 거리는 마라톤 하프코스 정도. 참고로 매년 사이판에서 마라톤 대회가 열리는데 섬 중간쯤(가라판)에서 출발해 남쪽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가 북쪽 끝까지 왕복을 해야 풀코스 마라톤 경로가 완성된다.
사이판은 관광보다 휴양에 적합한 여행지다. 나무 그늘 아래 누워 바다를 바라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마음이 느슨해진다. 졸리면 자고, 배고프면 먹고, 심심하면 책 읽는 여행. 잠시 일상의 무게를 내려놓고, 자연을 만나는 시간이다. 사이판에서는 마음이 시키는 대로 발걸음 닿는 대로 시간을 보내길 추천한다. 인생의 쉼표는 누구에게나 필요하니까. 조금 더 자유로운 여행을 하고 싶다면 차를 렌트해 다니는 것도 좋다. 사이판은 섬 자체가 작은 데다가 도로가 단순해 자동차 여행을 즐기기에 제격이다.
사이판에서 렌터카 운전은 매우 쉬운 편이다. 한국에서 발급받은 자동차 운전면허증이 있다면 별도의 국제면허증 없이도 운전이 가능하다. 운전 방향도 한국과 같아 생소하지 않다. 한가지 주의사항이라면 ‘STOP’ 표지 잘 지키기. 특히 어린이 통학버스가 도로에 멈췄을 때에는 양방향 차량 모두 정지해야 한다.
버드아일랜드
사이판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해변이다. 사이판의 서쪽은 산호초로 이루어진 자연 방파제가 파도를 막아 수심이 낮고 잔잔하다. 반면 동쪽은 바위 절벽으로 이루어져 수심이 깊고 거칠다. 이러한 이유로 호텔과 리조트는 사이판 서쪽 해변을 따라 모여 있다. 동쪽 해변은 진입 자체가 힘들고, 위험한 곳이 많으므로 주의할 것!
해돋이를 보고 싶다면 하루 정도는 부지런을 떨어 봐도 좋다. 사이판 북동쪽 매독 곶에 있는 버드 아일랜드가 일출 명소로 손꼽힌다. 버드 아일랜드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 섬엔 다양한 새가 서식한다. 석회암으로 이뤄진 작은 섬을 자세히 보면 석회암 바위에 수많은 구멍이 뚫려 있다. 그 속에 새가 둥지를 틀어 보금자리를 마련한다. 자연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있어 섬 자체에 진입이 불가하지만 섬이 보이는 전망대에서 일출을 맞이할 수 있다. 짙푸른 바다 위로 솟아오르는 일출을 바라고 있으니 괜히 가슴이 뭉클하다. 태평양 너머에서 해가 솟아오르면 비로소 사이판의 하루가 시작된다.
사이판 명물 해변은 중서부에 있는 마이크로 비치다. 하얏트 리젠시 호텔을 중심으로 약 1km에 거쳐 해변이 펼쳐진다. 수심이 낮고 파도가 잔잔해 물놀이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다.
호젓한 해변을 즐기고 싶다면 남쪽으로 향할 것. 관광객은 대부분 유명한 해변에서 시간을 보내지만 현지인은 사이판 남부 해변을 즐겨 찾는다. 비포장도로를 지나야 해서 조금 번거로울 수 있지만 내비게이션 안내를 따라가면 어렵지 않다. 사이판 공항 근처에 있는 래더 비치와 오비얀 비치를 추천한다. 아담하고 잔잔한 해변 분위기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주말에는 오전부터 자리를 잡고, 캠핑이나 바비큐 파티를 즐기며 시간을 보내는 현지인이 많다.
절벽 아래에 숨어 있는 래더 비치는 해변 입구까지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야 해서 ‘래더 비치(Ladder Beach)’라는 이름이 붙었다. 지금은 사다리 대신 계단이 놓였다. 해변에 동굴이 있어 비를 피하거나 휴식을 즐기기에도 안성맞춤이다. 래더 비치에서 동쪽으로 이동하면 오비얀 비치가 나온다. 오비얀 비치 역시 조용하고 한적한 분위기다. 손바닥에 모래를 찍어 자세히 관찰하면 별 모양으로 깎인 산호모래를 발견할 수 있다. 오비얀 비치 주변에는 1,500여 년 전 고대 차모로 유적지인 라테 스톤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쓰였던 벙커가 남아있어 영화 속 세트장을 방불케 한다.
마이크로 비치
래더비치
사이판 중심지 가라판에서 북쪽으로 15분 정도 달렸을까. 깎아지른 절벽의 비경을 품고 있는 만세 절벽에 도착했다. 눈부시게 빛나는 풍경 속에 가슴 아픈 역사를 간직한 사이판. 일제강점기 때 한국인 징용자들이 남태평양의 이름 모를 섬까지 끌려와 희생당했다. 만세 절벽에는 가슴 아픈 상흔이 남아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세력에 밀린 일본군은 만세 절벽과 자살 절벽 위에서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며 망망대해로 뛰어내렸다. 안타까운 사실은 무리 속에 어쩔 수 없이 바다에 몸을 던져야 했던 한국인 징용자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절벽 아래 쉬지 않고, 파도가 몰아치며 물보라를 일으킨다. 만세 절벽은 사이판 별빛투어 명소로도 유명한 장소다. 주변에 불빛이 없어 맑은 날이면 쏟아질 듯한 많은 별을 볼 수 있다.
‘마나가하 아일랜드에 가지 않으면 사이판에 가나마나’라는 말이 있다. 사이판 여행을 다녀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나가하 아일랜드에 다녀올 만큼 유명한 스폿이다. 사이판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15분이면 도착하는 작은 무인도다. 스노클링, 스쿠버 다이빙, 바나나보트, 씨워커, 패러세일링 등 각종 해양 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액티비티 성지가 바로 마나가하섬이다. 그늘에 앉아 바다 풍경만 감상하고 있기엔 어딘가 모르게 아쉽다. 세상에 무서운 것이 많은 최고 레벨 쫄보인 나도 마나가하 아일랜드에서 만큼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스노클링을 하며 다양한 수중 생물을 구경했다. 수영을 하지 못해도, 특별한 기술이 없어도 스노클링 장비만 있으면 바다 속 탐험이 가능하다. 수심 2~3m 이내 얕은 바다인데도 형형색색 다양한 열대어가 인사를 건넸다. 맑고 깨끗한 바다를 이리저리 누비며 산호초와 열대어를 구경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바다 속 구경을 마쳤다면 다음은 바다 위를 날아볼 차례. 스피드보트에 낙하산을 연결해 비행을 즐기는 패러세일링에 도전했다. 바다의 물결을 시원하게 가로지르는 보트가 점점 속도를 올리자 심장도 같이 날뛰었다. 낙하산과 연결된 줄이 풀려 나가면서 순식간에 날아올랐다. 마치 한 마리의 새가 된 것 같았다. 하늘 높이 올라갈수록 나도 모르게 괴성이 터져 나왔고, 소리를 한껏 내지르니 답답한 마음이 시원해졌다. 어디 그뿐이랴. 하늘에서 내려다본 마나가하 아일랜드의 풍경은 그 어떤 보석보다 빛났다. 태평양 바다 위를 날아보고 싶다는 꿈은 현실이 되었다.
크기는 작지만 먹거리만큼은 풍부한 사이판. 휴양지답게 다양한 세계음식을 즐길 수 있다. 일식, 중식, 양식, 한식, 차모로식 까지. 하루 세 끼가 아쉬울 뿐이다. 사이판 인근 바다에서 갓 잡아 올린 참치는 사이판의 대표 음식이다. 냉동 참치와는 비교 불가. 생 참치회는 입안에 넣자마자 살살 녹는다. 상큼한 라임소주를 곁들이는 것도 꿀팁.
사이판 전통음식인 차모로식은 식민 시대를 거치며 독창적인 스타일로 발전했다. 참치회를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매콤달콤한 양념에 버무린 포키(Poki), 바삭하게 튀긴 생선에 볶은 채소를 올려낸 에스카베체 (Escabeche), 밀가루와 코코넛 가루를 섞어 반죽한 후 동그랗게 구워낸 티티야스 (Titiyas), 쫄깃한 코코넛 찹쌀떡 아피기기 (Apigigi) 등은 한국인 입맛에도 잘 맞는다. 매주 목요일 가라판 시내 근처에서 열리는 야시장이나 차모로 전통식당을 찾아가면 맛볼 수 있다.
해질 무렵 사이판 주요 호텔과 리조트 식당에서는 선셋 바비큐가 열린다. 돼지고기, 소고기, 닭고기 등을 소스에 숙성시켜 즉석에서 굽는다. 야외 테라스 자리에서 붉게 물드는 석양을 감상하며 식사를 즐기는 동안 원주민 쇼가 열린다. 음악에 맞춰 화려한 의상을 입은 댄서가 전통춤과 불쇼를 선보인다. 하루를 마무리하며 맛있는 식사와 함께 특별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북마리아나제도 (사이판) 입국자에 대한 코로나 대 응 관련 조치를 해제했다. 백신접종은 필수가 아니 며 격리도 하지 않는다. 무비자 관광목적의 경우 최 대 45일까지 체류 가능하며 코로나19 관련 아무 제 약 없이 입출국 할 수 있다. (2023년 7월 기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