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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와 오늘이 교차하는 곳
근대로의 여행, 정동길

서울 정동길은 근대유산 1번지이다.
조선과 대한제국 그리고 일제강점기를 잇는 격동과 수난의 역사가길 곳곳에 아로새겨져 있다.
덕수궁 대한문에서 경향신문사까지, 바쁜 직장인들에게는 걸어서 5분도 안 되는 짧은 구간이지만
역사의 흔적을 천천히 되짚어가며 걷다보면 옛이야기들이 발목을 잡고 놔주질 않는다.
짧지만 결코 짧지 않은 정동길에서 이야기보따리를 들쳐봤다.

글·사진. 임수아(여행작가)

수문장들이여, 근대의 기억을 지켜주시오
이문세의 노래 ‘광화문 연가’에 나오는 덕수궁 돌담길, 정동길, 조그만 교회당을 찾아 덕수궁 대한문 앞에 섰다. 왕궁수문장 교대의식이 한창이다. 관람객들은 역사를 담고 있는 다큐멘터리 작가처럼 카메라 뷰바인드로 현장을 들여다본다. 수문장들의 일사불란하고 엄숙한 분위기는 근대와 현대를 잇는 기억의 문을 지키는 것 같다.
힘찬 북소리와 함께 왕권을 상징하는 오방기를 든 수문군이 들어온다. 모든 행사는 승정원 주서의 감독 하에 진행된다. 교대식이 끝나자 무예 시범이 이어지고, 관람객들은 박수와 환호로 화답한다. 교대의식은 매일 3차 례(11:00, 14:00, 15:30) 열리는데 때를 잘 맞췄다.
덕수궁은 임진왜란 이후 선조가 임시 거처인 ‘시어소’로 쓰다가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경운궁’이라 불렀다. 이후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 선포와 함께 황궁으로 사용했다. 근대의 흔적을 궁궐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1910년에 지어진 석조전이 대표적이다. 한옥과 서양건축이 100년 이상 한집살이를 하고 있는 모습이 특이하 다. 커피를 유난히 좋아했던 고종황제가 외교 사절들과 연회를 가졌던 ‘정관헌’도 찾아볼 만하다. 한국과 서양 건축양식이 혼합된 건축물이다.
대한문을 뒤로하고 덕수궁 돌담을 따라 곧장 서울시청 서소문별관 13층으로 향했다. 정동을 한눈에 내려다보기 위해서다. 탁 트인 유리창 너머 서울시청광장과 덕수궁 그리고 정동길이 거침없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 뒤로 인왕산이 새하얀 암벽을 드러내며 우람하게 버티고 있다. 전망대 카페에는 100여 년 전 빛바랜 흑백사진 속정동을 전시 중이다. 과거의 모습에서 지금의 정동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다른 모습이다. 과거를 살아보지 못한 현대인으로서 가늠할 수 없는 놀라운 변화다. 정동길에 처음 발을 디딘 외국인들과 상투 튼 조선인들 또한 과거의 시간에 갇혀 지금을 상상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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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1. 서소문서울시청별관 카페에서는 덕수궁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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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 배재학당역사박물관의 실내 전시관


섬김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함이라

다시 덕수궁 돌담 아래를 걷는다. 정동은 1396년 태조 임금이 계비 신덕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경복궁 망루에서 잘 보이는 지금의 정동인 도성 안에 정릉을 조성했다. 왕후를 사랑하는 마음이 두터웠나 보다. 이후부터 이곳을 정동이라 불렀다. 그런데 태조의 아들 태종은 의붓어머니인 신덕왕후와 껄끄러운 사이여서 급기야 능을 파묘해 지금의 정릉동으로 옮겨버린다. 결국 왕후의 정릉은 없어지고 이름만 남은 식이다.
숲속 오솔길 느낌이 나는 진입로를 따라 옛 대법원청사를 찾았다. 1928년에 지어진 경성재판소 건물이다. 일제강점기에 어떤 식의 재판이 이뤄졌을지 보지 않고 듣지 않아도 보이고 들리는 듯하다. 건물 전면부가 70여 m나 될 만큼 당시에는 꽤난 큰 건물이었다. 죄 없는 사람도 건물의 권위에 압도당했을 것 같다. 현재 옛 대법원 청사는 서울시립미술관으로 이용 중이다. 상설전시와 기획전이 항상 열린다. 점심시간에 짬을 낸 직장인들이 여럿 보인다.
정동길에는 유난히 ‘우리나라 최초’가 많다. 배재학당 역시 1885년 선교사였던 아펜젤러 목사가 우리나라 최초로 세운 신식 교육기관이다. 처음 학당 문을 연 곳은 한옥이었으나 1887년에 최초의 서양식 벽돌 양옥이 지어지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동관으로써 1916년에 지은 건물이다. 서양인 목사가 세운 학교에 ‘배재학당’이라는 우리식 이름이 지어진 이유는 고종임금이 배재학당을 정식교육기관으로 윤허하면서 편액을 하사하였기 때문이다. 배재학당은 ‘유용한 인재를 기르고 배우는 집’이란 뜻이다. 한편, 배재학당은 모든 수업을 영어로 진행했는데 이것도 우리나라 최초다.
배재학당은 단순히 학문을 가르치는 수준이 아니었다. 우리 민족에게 자유, 진리, 평등이라는 기독교 교리에 입각한 자유민주주의를 심어줬다. 그것은 학당훈에 잘 나타나 있는데 신약 성경 마태복음 20장 28절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에서 따왔다. 이러한 교육을 받으며 배출된 인물이 이승만 초대 대통령, 한글학자 주시경 선생, 독립운동가 지청천, 시인 김소월 등이다. 특히 독립협회 결성과 독립문축조, 협성회 조직 등에 앞장섰던 서재필은 배재학당의 강사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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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 배재학당은 1885년에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사립교육기관이다.

정동길의 영원한 랜드마크

‘눈 내린 조그만 교회당’의 주인공은 정동제일교회다. 아펜젤러 목사는 1885년 한옥 한 채를 구입해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이후 1897년 현재의 자리에 최초의 서양식 개신교회 벧엘예배당이 세워졌다. 예배당은 건축 당시 세간의 이목이 집중될 만큼 규모가 켰고 건축양식 또한 이국적이었다. 민족대표 33인인 이필주 담임목사는 교회 파이프오르간 아래 지하실에서 독립선언문을 비밀리에 등사한 협의로 박동완 전도사와 함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벧엘예배당은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의 졸업식 장소로도 활용됐다.
돌담이 에두른 서양식 붉은 건축물은 이화여고 심슨기념관이다. 이화학당은 1886년 미국 선교사 메리 스크랜튼 부인이 1887년 고종황제로부터 ‘배꽃처럼 순결하고 아름답게 교육하라’는 뜻의 교명 이화학 당(梨花學堂)을 하사받아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교육기관이다. 처음에는 교육과정도 없었던 시기 인지라 영어로 주기도문과 찬송가를 가르치면서 첫 교육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영어를 배워 명성황후의 영어 통역관이 되고자 했던 김씨 부인이 미국에 건너가 우리나라 최초의 여학 사인 ‘하란사’가 됐으며, 8살 소녀 김점동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의사가 됐다. 일제에 항거했던 유관순 열사도 이화학당 출신이다. 이와 같이 이화학당은 가난에 찌들고 이름도 없이 천대받았던 여성들을 나라를 지킨 선구자로 키워내는 역할을 했다. 박물관으로 사용 중인 심슨기념관에는 이화학당 시절의 자료와 당시 모습을 재현한 교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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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 정동제일교회 파이프오르간 밑 지하실에서 민족대표 33인인 이필주 목사와 박동완 전도사가 독립선언문을 등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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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 정동제일교회에는 선교사 아펜젤러의 흉상이 세워져 있다.

근대와 현대가 마주하는 곳

이화박물관 앞 좁은 골목길을 따라 들어가면 중명전이 나온다. 1897년 대한제국 선포 후 경운궁(지금 덕수궁)의 황실도서관으로 사용하던 서양식 건물이다. 황실도서관이 왜 궁궐 밖에 있을까 싶지만, 원래 여기도 궁궐 땅이었다. 안타까운 것은 중명전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면서 외교권을 상실한 비운의 장소다.
캐나다대사관 옆으로 난 오르막길 끄트머리에 옛 러시아공사관이 있는데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게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발발하자 고종이 세자와 1년간 피신해 머물렀던 곳이다.
러시아공사관은 대한제국 당시 가장 규모가 컸다. 또한 가장 높은 언덕에 자리해 정동 어디서나 러시 아공사관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고 한다. 고종은 여기서 1년여 동안 머물며 조선의 근대화를 고민했을 것이다.
옛 러시아공사관을 돌아 나오자 과거에서 오늘로 나온 듯하다. 정동길은 변함없는 일상의 공간이다.
삐딱삐딱 좁은 보폭으로 바쁘게 걸어가는 직장 여성들, 무거운 가방을 등에 짊어진 채 투덜투덜 무겁게 발걸음을 옮기는 학생들, 간만에 잡은 먹잇감으로 포식한 사자마냥 배를 두드리며 느릿느릿 걷는 직장인, 커피 한잔을 손에 들고 오전에 있었던 업무를 줄줄 늘어놓으며 금쪽같은 자투리 시간을 만끽 하는 사람들이 때론 전투하듯, 혹은 여유롭게 오가는 곳이 정동길이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그들에 게만큼은 정동길은 전쟁터 같은 일상의 무대이다. 100여 년 전 격동의 시대를 살았던 그 시대 사람들 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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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6. 을사늑약이 체결된 중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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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7. 정동길은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이어진다.

지역 별미
덕수정은 오징어볶음이 유명하다. 매운맛을 조절할 수 있으며 양도 푸짐하다. 옛 신아일보 사옥 옆.
02-755-0180, 서울 중구 정동길 4
내비게이션 정보
배재정동빌딩(서울 중구 서소문로11길 19), 유료주차장 이용
대중교통
지하철 서울역 1호선(2번 출구), 2호선(12번 출구) 도보 이용
정동길 코스 정보
덕수궁(02-771-9952) - 서울시청 서소문별관 전망대 - 서울시립미술관(02-2124-8800) - 배재학당 역사박물 관(02-319-5578) - 정동제일교회(02-753-0001) - 정동극장(02-751-1500) - 중명전(02-732-7524) - 신아일보 사별관 - 이화여고 심슨기념관(02-3277-3152) - 옛 러시아공사관 - 한성교회 - 경향신문사
탐방신청 및 문의
매주 토·일 13:30, 문화유산국민신탁(02-752-7525), 서울시 관광안내소(02-735-86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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