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밝히는 불빛 燈

또 하나의 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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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과 사람 그 사이를 잇다

땅, 설계도의 밑그림이 되다
벌써 10년째다. 오늘 밤도 강남 교보사거리에는3,000여 개의 달이 뜬다. 건물 전체를 촘촘히 채운 지름 1m의 동그란 구멍, 그곳으로 불빛을 쏟아내는 어반하이브가 그 주인공이다. 어반하이브는 강남에 색다른 표정을 새기며 교보사거리의 상징물이 됐다. ‘도심의 숨구멍’이라고도 불리는 어반하이브에는 땅의 과거를 공부하고, 건물과 사람의 소통을 소중히 여기는 건축가 김인철(71)의 철학이 담겨있다. 어반하이브가 위치한 강남역 부근의 땅은 도시개발로 쉴 틈이 없었다. 과수원이었던 땅은 유흥가로 그리고 지금의 상권으로 모습을 바꿔왔다. 중심부에 굵직한 직선 도로가 자리 잡고 있고, 도로 양옆으로 세워진 건물들은 죄다 네모 반듯하다. 녹지도없어 답답한 느낌이 강했다.
김인철은 콘크리트에 3,371개의 구멍을 뚫었다. 이곳에 필요한 것은 생기와 소통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리고 그 구멍들은 제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건물 이용자들은 동그란 창문 사이 풍경에 신선함을 느꼈고, 길을 걷던 사람들은 동그라미 사이로 힐끗힐끗 보이는 실내 모습에 호기심을 가졌다.
“건축은 땅이 존재하기에 가능한 예술입니다. 설계에 앞서 땅의 역사를 읽는 이유죠. 땅이 가진 각각의 특색을 읽고 반영하면 같은 건축물이 나올 수 없습니다.”
김인철의 건축 설계는 이처럼 땅을 이해하고 그 땅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대지를 둘러싸고 있는 주위 풍경이 좋아서’ 시공을 맡게 됐다는 춘천의 ‘호수로 가는 집’ 역시마찬가지다. 디자인을 최소로 해 집이 주변의 산과 물, 숲의 풍경을 헤치지 않게 했다.
공간,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품다
김인철은 공간에 힘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이를 경계한다. 때문에 ‘공간이 사람을 지배한다’는 말은 김인철의 건축물과 거리가 멀다. 땅을 읽는 것이 그의 설계 시작점이었다면 공간을 열어두는 것 즉, ‘수용성’은 설계 전체를 이끌어가는 화두다.
“오랫동안 버틸 수 있게 짓습니다. 지속가능성을 말하는 겁니다. 당장의 필요에만 맞춰 설계하면 결국 공간이 사람을 제한하게 되지요. 시간과 쓰임의 변화를 모두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듭니다. 물리적 수명이 유지되는 한 계속 쓰이는 것이 공간의 존재 이유니까요.”
공간의 수용성을 엿볼 수 있는 그의 대표 건축물 중 하나는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 파티(PaTI)다. 파주에 위치한 파티는 그래픽 디자이너 안상수가 세운 디자인 대안 학교다. 지난 1월 김인철은 졸업 전시회에 다녀왔다. 완공한 지 4년 만이다.
“제가 여러분께 선물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동기부여입니다.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필요에 따라 공간을 바꿀 수 있습니다. 앞으로도 학기마다 바뀔 학교의 모습을 기대하겠습니다.”
설계 당시 김인철이 가장 집중한 것은 비워내는 것이었다. 교실도, 문도 심지어 난방시설도 없다. 공간을 따로 구분하지 않고 계단을 통해 4층 규모의 전 층을 이었다. 한 칸의 계단이 하나의 스튜디오이자 교실이다. 학생들이 공간을 쓰며 거침없이 더하고 고쳐갈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결국 학교의 가르침을 그대로 반영하는 건축물로 태어났다. 김인철과 안상수 교장, 학생들이 수차례 만나 생각을 나누며 생활의 공간이자 배움의 공간이 되었다.
도로, 시대와 삶을 말하다
건축물에는 건축주의 의견과 시공자의 생각, 재료의 유무가 다양하게 얽히고 설킨다. 하지만 한걸음 물러나 바라보면, 건축은 그 시대의 사람들과 삶을 반영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건축뿐만 아니다. 시설도 마찬가지다.
“현재 우리는 땅을 너무 거칠게 다루고 있어요. 주위를 둘러볼까요. 강남의 경우 10차선 대로를 중심으로 블록이 나뉘어 있죠. 그 작은 블록들이 우리의 생활공간입니다. 과거의 자연 발생적인 길이 자연과 자연을 잇는 기능을 했다면, 현재의 길은 양변을 나누기 위해 만들어지고 있어요. 각 구획이 하나의 섬이 되는 꼴이에요.”
한국에는 지루한 길이 너무나도 많다고 말하는 그. 기능에만 집중하는 것만큼 삶을 재미없게 만드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김인철은 자연을 엎어내고 만든 대로들과 그 대로에서 교통체증으로 인해 앞으로 가지 못하는 차들을 볼 때마다 진정한 효율성이 무엇인지 고민한다.
“이제 공학적인 개념이 아닌, 지형과 주변 환경을 고려한 도로를 만들었으면 합니다. 사람들이 이 길을 지나며 얻었으면 하는 것을 생각해볼 수도 있지요. 그중 하나가 안전일 거예요. 도로의 경관을 ‘즐길거리’로 바꾼다면 어떨까요. 만끽할 수 있는 거리를 두고 목적지만 생각할 운전자는 매우 적을 겁니다.”
건축, 사람과 통하다
통(通)하는 공간. 그는 건축물이 구분선이 되는 것을 경계한다. 대신 밖과 안이, 건물과 땅이, 대지와 사람이 통할 수 있기를 고심한다. 결국 그의 건축물은 밖과 안을 잇는 하나의 길이 된다. 그 정도(正道)를 찾는 김인철은 건축을 바라보는 일부 사람들의 시선이 안타깝다.
“건축물을 부동산 개념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본인의 돈을 들여 짓는 건물이니 모든 의견을 반영해달라고도 하죠. 건축가들은 말합니다. 건축물은 사유재이자 공공재라고요. 한 도시에 자리 잡고 있는 건축물은 사람들의 일상에 크고 작은 영향을 준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김인철이 자신의 건축 사무소 ‘아르키움’을 연 지도 벌써 32년. 대로변의 거대한 빌딩부터 한 평짜리 작은 화장실까지. 긴 세월 동안 매일, 수많은 시선이 김인철이 만든 공간을 훑고 스쳤다. 그런 의미에서 건축가는 늘 다른 이에게 노출되는 직업이다. 그는 그게 바로 건축가의 매력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력을 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저는 제가 짓는 공간이 사람들의 추억과 기억의 소재가 됐으면 해요. 이런 공간을 만들기 위해 저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시대를 읽으며 더 나은 삶의 공간을 연구해야 하겠지요. 인생에 지울 수 없는 기억을 만드는 공간. 그 공간을 만드는 것. 정말 멋진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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