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전령 ‘매화’피는 남녘땅을 찾아,
광양 매실마을
바야흐로 꽃피는 춘삼월, 새봄이다. 따사로운 봄볕에 거추장스러운 겉옷은 벗어두고 남녘으로 봄 마중을 나선다.
지리산과 섬진강이 만나는 양지바른 땅 광양에는 안개꽃이 만개한 듯 매화가 흐붓이 피었다. 청·홍·백 고혹적인 색감에 눈이 어지럽고 그윽한 향에 정신이 몽롱하다. 동네방네 꽃잔치가 열린 섬진강자락 광양으로 떠나본다.
글·사진. 임수아(여행작가)
봄 마중하기 좋은 남녘땅을 찾아
북극한파가 유난히 기승을 부렸던 지난 겨울. ‘이젠 봄이 오겠지…’라며 창밖의 메마른 나뭇가지를 물끄러미 바라본 사람, 아마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봄은 우리 곁에 어떻게 다가올까. 이은상 시인은 <동무생각>에서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이라며 봄은 음악과 함께 온다고 했다.
차이콥스키는 <사계> 중에서 ‘3월’을 종달새의 지저귐과 같은 선율로 가볍고 즐거운 마음을 담았다. 봄은 희망이며 변화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거리의 가로수와 언 땅을 뚫고 올라온 여린 새순과 꽃들을 바라보며 봄이 왔음을 느낀다. 뺨을 스치는 바람과 따스한 햇살도 그렇다. 코끝을 기분 좋게 자극하는 향긋한 꽃내음 역시 봄의 전령이다. 이처럼 봄은 시각, 촉각, 후각으로 우리 곁에 다가온다.
그야말로 봄은 감각으로 충만한 계절이다.
봄 마중하기 좋은 곳은 역시 남녘이다. 하지만 남녘땅이라고 해도 모두가 그렇지는 않다. 550리 섬진강 물길이 굽이굽이 흘러 따뜻한 남쪽 바다, 남해에 이르는 전라남도 광양이 봄을 맞이하기에 제격이다. 광양의 여러곳 중에서도 지리산이 병풍처럼 드리우고 구렁과 산등성이 반복되는 백운산 자락, 섬진마을이면 더욱 금상첨화겠다.
동백꽃은 겨울을 이겨낸 꽃이다. 그 뒤를 이어 피는 꽃은 매화다.
꽃샘추위를 이겨내고 망울을 터트리기 시작해 3월 중순부터 말까지 가장 아름다운 시절을 보낸다. 그 뒤를 이어 벚꽃, 배꽃이 핀다. 이때가 되면 봄이 정점이다.
전라남도 구례와 광양을 연결하는 861번 지방도 주변, 특히 광양 섬진마을에 이르면 매화가 상춘객을 맞이한다. 이 마을을 지나는 도로명이 ‘섬진강매화로’인 까닭도 매화 덕분이다.
섬진마을을 흐르는 섬진강은 두꺼비 ‘섬(蟾)’에 나루 ‘진(津)’을 쓴다. 고려말 왜구들이 섬진강을 따라 노략질하러 왔다가 두꺼비 떼의 울음소리에 놀라 달아났다고 해서 섬진강이라 부른다. 섬진강 상류는 강폭이 좁은데다 지리산 남부의 협곡을 지나면서 물살이 급해진다. 그나마 광양에 이르러서야 강폭도 넓어지고 물살도 고요하게 잦아든다.
- 탁월한 전망을 선사하는 팔각정
- 섬진강 물길처럼 구불구불한 오솔길
매화를 가꾸는 손길은 정성이 아니라 사랑이어라
섬진마을은 섬진강변과 백운산 기슭을 따라 매화가 흐드러지게 펴매화마을이라 불리지만 원래는 밤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지금처럼 매화나무가 주수종이 된 까닭은 1920년대 고(故) 김오천 옹이 처음으로 매화나무를 심기 시작하면서부터다. 며느리인 홍쌍리 여사가 대를 이어 오늘날 청매실 농원으로 발전시켰다. 홍 여사는 국가지정 매실명인 1호와 신지식인 농업인으로 지정받았지만 시집오기 전까지만 해도 광양이 어딘지도 모르는 밀양 아가씨였다. 부산 국제시장 건어물상에서 일하던 그녀가 이곳에 시집온 해가 1965년이니, 햇수로 53년째 매화와 동고동락하고 있는 셈이다.
청매실 농원이 자리한 백운산 자락은 땅이 거칠고 오르내림이 심하다.
이런 척박한 곳에 매화나무를 심고 가꾸려니 홍 여사의 고생과 억척스러움은 불을 보듯 뻔하다.
홍 여사는 특히 2006년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36년 만에 찾아온 지독한 가뭄으로 온 농원이 목말라했던 그때. 그녀는 타들어가는 매화나무를 붙잡고 울며 아래와 같이 한 편의 시를 남겼다.
스무 세 살 꽃보다 아름다운 나이에 의지할 곳 없는 외딴 곳에 시집을 와서 한평생 정을 쏟은 매화는 그녀에게 꽃나무 이상이었다. 지난 세월, 숱한 이야기 보따리 속에는 기쁨과 눈물이 흥건히 배여 있다.
<봄은 천국>이라는 시에서도 매화를 향한 그녀의 사랑을 확인할 수있다.
- 백운산 중턱에서 바라본 모습, 뒤에 섬진강이 흐른다.
- 소녀의 청초하고 발랄한 아름다움이 물씬 풍기는 백매
- 봄바람의 속삭임을 들을 수 있는 대숲길
온몸을 휘감는 매화향에 취해
해마다 3월이면 청매실 농원에서 매화축제가 열린다. 금년에는 어느새 스무 돌을 맞았다. 명실상부 우리나라 ‘매화 감상 1번지’라 해도 손색없는 역사다. 청매실 농원은 매화나무만 있는 게 아니다.
2,000여 개에 이르는 장독과 봄바람이 속삭이는 대숲길, 임권택 감동의 영화 <취화선>을 촬영한 세트장, 향수를 자극하는 조각공원 등 볼거리도 풍성하다.
주차장을 지나 비탈진 길을 5분 정도를 오르면 팔각정에 이른다. 정자에서 오른쪽을 향하면 섬진강이 굽어보이고 반대쪽에는 온 산야에 안개꽃 마냥 화사하게 핀 매화가 흐붓하게 한눈 가득 담긴다. 매화의 기품은 세 가지 색으로 드러난다. 소녀의 청초하고 발랄한 아름다움이 물씬 풍기는 백매(白梅)와 선비의 고고한 멋이 느껴지는 청매(靑梅), 우아한 여인이 뿜어내는 고혹적인 매력의 홍매(紅梅)까지. 임권택 감독의 영화 <취화선>, <천년학>을 촬영했던 세트장이 매화와 어우러져 고운 수채화를 그려놓은 듯하다. 섬진강 물길처럼 이리저리 휘어진 탐방로를 따라 걷다보면 어느새 장독대 앞. 따스한 봄 햇살 아래에서 매실장아찌와 매실된장, 매실액이 뭉근하게 익어간다.
약알칼리성 식품인 매실은 피부미용과 피로회복은 물론이고, 장기능 개선과 소화에 특히 좋은 건강식품으로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홍 여사는 “매실이 올라간 밥상은 약상”이라고 말한다.
매화나무가 늘어서 있는 오솔길을 따라 이름 모를 풀들이 파릇파릇하게 돋았다. 냉이와 쑥도 연한 잎을 피우며 봄볕을 만끽한다. 차이콥스키에게 영감을 준 3월의 종달새는 아니지만 매화나무 가지에 앉은 참새가 짹짹짹 봄을 노래한다.
발길이 백운산 중턱에 마련된 전망대에 닿는다. 매화향이 온몸을 감싼다. 먼발치에 섬진강이 비켜 흐르고 그 너머 하동 땅도 아스라이 눈에 들어온다. 매화나무가 촘촘히 심긴 비탈에는 봄바람이 매화꽃잎을 살랑살랑 흔든다. 그 바람에 매화향이 온 산야를 휘감아 날아간다.
- 하동 십리벚꽃길로 유명한 19번 국도.
- 임권택 감독의 영화 취화선, 천년학을 촬영했던 세트장이 매화와 어우러져 있다.
- 매화나무 아래에 이름모를 풀들이 파릇하게 돋아나 더욱 싱그럽다.
봄바람 가르는 섬진강 드라이브
바람 따라 매화향 따라 섬진강 드라이브에 나선다. 매화마을을 찾는 사람이라면 빼놓을수 없는 봄날의 유희리라. 매화마을 입구에는 수월정이 자리한다. 수월정은 나주목사를 지낸 정설이 만년을 소일할 뜻으로 1573년에 세웠던 정자인데, 지금 것은 1999년에 복원한 것이다. 수월정에 올라 섬진강과 주변 산야를 바라본다. 매화가 지천에 한가득 피었으니 온 세상이 하얗다. 바람에 날려 섬진강에 떨어진 매화꽃잎은 물결과 함께 새로운 세상을 쫓아 긴 여정을 떠난다. 이처럼 서정적인 봄날의 풍미는 송강 정철의 발걸음을 붙잡아 <수월정기>란 가사를 세상에 내놓았다. 선조 때 형조좌랑을 지낸 수은 강항 또한 <수월정삼십수>라는 시조 30수를 지어 이곳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도로 아래 강변에는 자전거 도로가 조성돼 있어 라이딩을 즐기기에도 손색없다.
섬진나루터에 내려서면 재첩 캐는 풍경도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아직 강물이 차가운지 나선 이가 없다. 섬진교를 건너면 경상남도 하동 땅이다. 3월에 광양 매화가 제철이라면 4월에는 하동의 벚꽃이 제철이다. 19번 국도를 따라 북쪽으로 달리면 경상도와 전라도가 만나는 화개장터가 나오고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의 배경이 된 평사리 악양들녘에 이른다. 들녘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에는 드라마 <토지>를 촬영하기 위해 만든 세트장이 있다. 철저한 고증을 통해 지은 곳이라 여느 세트장으로 생각했다간 큰코 다친다. 평사리문학관이 있으며 최참판댁 등 기와집과 초가집이 옹기종기 모여 운치를 더한다.
T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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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비게이션 정보
전라남도 광양시 다압면 도사리 414 청매실농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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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기 좋은 곳
호텔 락희(061-913-5000)는 광양에서 최고급호텔로 손꼽 힌다. 아쿠아리움 패키지를 포함해 다양한 패키지 상품이 있다. 하버브릿지호텔(061-797-0900), 굿데이모텔(061-794-8877)은 모던하고 깨끗한 시설을 자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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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돌아보면 좋은 곳
망덕포구에는 윤동주 유고 보존가옥이 있다. 윤동주 시인이 일본 유학을 떠나면서 건네준 육필 원고가 온전히 보존되었던 곳이다. 윤동주는 1941년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발간하려 했으나 발간을 포기하고 자필원고 한 부를 연희전문 시절 친구인 정병욱에게 맡겼는데 그것이 어렵게 보존되다가 광복 후 1948년에 간행되어 빛을 보게 되었다. 유고 보존 가옥은 원래 양조장과 주택을 겸용한 건물로서 당시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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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의
청매실농원 (061-772-4066)
광양시 관광안내소 (061-797-3333)
광양매화축제 (061-797-27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