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멈춤

담장 너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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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딘 템포의 문화가 숨쉬는 도시,
호주 멜버른

'뒷골목의 도시', '미식가의 도시', '정원의 도시'… 호주 멜버른에 붙는 수식어들은 다채롭다. 빛바랜 건축물과 오래된 트램, 그래피티들은 탐스러운 조화를 이룬다. 멜버른은 뚜벅뚜벅 걷고 싶은 욕망이 숨쉬는 도시다.

글. 사진. 서영진(여행칼럼니스트)
멜버른의 도심 산책은 유럽 소도시를 걷는 착각을 만들어낸다. 비좁은 골목은 오래된 아케이드와 낯선 바, 그래피티의 세상이다. '넘버1' 도시의 타이틀을 시드니에 내주고 수도 역시 캔버라에 건넨 것은 오히려 다행스럽다. 도시는 무모하게 확장을 거듭하지 않았고, 거리 곳곳을 채운 조형물들은 따사롭게 발길을 붙든다. 골목을 벗어날 때 쯤 우연히 마주치는 트램들은 거리의 햇살만큼 더디게 흐른다. 벽화로 치장된 골목들은 뉴욕 브룩클린의 뒷골목을 연상시킨다. 어느 골목을 기웃거려도 보이는 작은 일탈은 기분 좋은 상념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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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야라 강을 따라 도시의 과거와 현대 건축물들은 조화를 이루고 있다.
  2. 빌딩숲 사이를 가르는 트램은 멜버른을 채색하는 매개다.
도심을 채우는 유럽풍 건축물

곳곳에 세계 각국의 문화가 혼재돼 있는 것은 화려했던 골드러시 시대 때의 흔적과도 연관이 깊다.

멜버른의 역사는 19세기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멜버른 서쪽 발라랏에서 금광이 발견되면서 시작된 골드러시로 세계 각지의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도시는 단초를 마련했다. 도심 곳곳에 세계 각국의 문화가 혼재돼 있는 것은 화려했던 골드러시 시대 때의 흔적과도 연관이 깊다.
도심을 둘러보는데 정해진 수순은 없다. 굳이 도시의 선명한 랜드마크를 꼽으라면 플린더스 스트리트 역이다. 1854년 세워진 멜버른 최초의 기차역은 멜버른의 과거를 대변하는 상징이다. 역 주변은 대도시의 역처럼 퀴퀴하거나 음울하지 않다. 건너편 영상센터와 나란히 들어선 페더레이션 광장은 연중 문화공연이 열리는 만남의 장소고, 19세기에 지어진 세인트 폴 성당은 고딕 첨탑에서 은은한 종소리를 쏟아낸다.
종소리와 트램 경적의 어울림 속에 맥주 한잔을 기울이는 일상이 플린더스 스트리트 역 주변에서는 수월하게 이뤄진다.
플린더스 스트리트의 명물은 이제 ‘호시어 레인’이 이어받았다.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를 통해 알려진 그래피티 골목은 한국에는 ‘미사 골목’으로 더욱 유명하다. 거리의 예술가들이 만들어낸 벽화 앞에서 독특한 포즈를 취하는 모습은 흔한 광경이다. 흥미로운 점은 무분별해 보이는 벽화에도 작가들의 사연과 약속이 담겨있다는 것, 실제로 그래피티의 속사정을 설명해주는 투어 프로그램이 따로 마련돼 있다.
그래피티로 치장된 뒷골목 투어

늘어선 건물들은 획일적이지 않고 저마다의 개성이 가득하다.

호시어 레인은 멜버른 뒷골목 탐방의 워밍업 정도다. 이런 말이 요즘 유행이라고 한다. '멜버른의 뒷골목을 탐하지 않았으면 멜버른의 겉만 훑고 떠난 것'이라는 실제로 걸어서 5분 거리로 연결되는 뒷골목들에는 도심의 오랜 정취가 담겨 있다. 그중 디그레이브스와 센터 플레이스 일대의 뒷골목들은 멜버른의 골목문화가 압축돼 있다. 노천카페 앞허름한 테이블에는 멜버른 청춘들의 일상이 낱낱이 드러난다. 높은 천장과 모자이크 바닥이 인상적인 블록 아케이드는 문화재로 지정돼 있고, 1869년 세워진 로얄 아케이드는 멜버른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골목길에서 만나는 오래된 찻집, 수제 초콜릿 가게, 빈티지 숍등에서도 풍미가 전해진다.
어둠이 내리고 상점들이 문을 닫으면 골목들은 다시 그래피티로 단장되며 도시의 이면을 채색한다. 멜버른의 뒷골목에 화려한 네온싸인은 굳이 필요 없다. 뉴요커들의 아지트처럼 멜버니언의 단골바들은 막다른 골목이나 허름한 1층 문을 지나 옥상에 보석처럼 숨어 있다. 플린더스 스트리트 역에서 야라 강을 건너면 도시는 색깔을 바꾼다.
강변을 따라 이어지는 사우스뱅크 산책로에는 남반구 최고층(88층)인 유레카 타워와 초대형 카지노가 들어서 있다. 유레카 타워에서 내려다보면 야라 강을 잇는 다리들은 묘하게 비틀리거나 유선형으로 우아한 멋을 전한다. 강 북쪽이 세인트 패트릭 성당, 퀸 빅토리아 마켓등 고색창연한 공간들로 채워진다면 강 남쪽은 아트센터, 국립미술관등 현대 건축물들이 도드라진다. 늘어선 건물들은 획일적이지 않고 저마다의 개성이 가득하다.
멜버른은 도심에 많은 공원이 있어 ‘정원의 도시’로 불릴 만큼 풍성한 녹지를 자랑한다. 10여 분만 걸어서 이동하면 푸른 숲과 새소리가 완연하다. 킹스 도메인은 야라 강을 끼고 남쪽으로 넓게 형성된 공원지대로 공원 안에는 1만 명 이상을 수용하는 야외음악당이 들어서 있다. 호주를 발견한 캡틴 쿡의 오두막이 있는 피츠로이 정원 등도 깊고 단아한 정취를 자랑한다.
멜버른 호주에서 가장 많은 극장과 갤러리, 박물관을 보유한 문화 예술의 도시이며 3,000여 개의 레스토랑을 자랑하는 미식가의 도시이기도 하다. 호주 테니스 오픈과 포뮬러 원 자동차 대회 등 굵직굵직한 스포츠 이벤트도 연중 열린다. 멜버른 파크는 한국의 테니스 스타 정현이 호주 오픈에서 사상 첫 메이저 4강에 오른 화제의 장소이기도 하다. 비스듬히 추상적으로 세워져 있는 도로의 게이트나 거리 곳곳에서 문득문득 만나는 현대 조형물들 역시 멜버른 거리가 보여주는 개성 넘치는 광경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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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멜버른에서는 골목 문화가 도드라진다. 화려한 그래피티로 인기 높은 호시어 레인.
  2. 멜버른 도심에서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자율 자전거.
  3. 추억의 상징인 자줏빛 트램은 멜버른 시내를 순환하며 무료로 운행된다.
‘죽기 전에 꼭 가볼’ 그레이트 오션 로드

서쪽 그레이트 오션로드는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단골 여행지’이다.

도심만 벗어나면 멜버른의 주변부는 이채로운 풍경들로 다가선다.
트램으로 닿는 세인트 킬다 해변은 청춘들의 천국이다. 멜버른 동북쪽의 야라 밸리에는 60여 개의 와이너리가 들어선 포도밭 세상이다. 차창에 매달린 채 달리는 단데농의 증기기관차 역시 흥미로운 추억거리다.
서쪽 그레이트 오션로드는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여행지’에 단골로 등장하는 곳이다. 1차 세계대전을 끝낸 퇴역 군인들의 땀방울이 깃든 길은 바람과 바다가 빚어낸 대자연의 신비를 간직한 채 200여km 파도를 따라 뻗어 있다. 최근에는 해변 절벽을 따라 트레킹하는 그레이트 오션 로드가 꽤 인기 높다. 그레이트 오션 로드와 함께 늘어선 평원과 해변을 달리다 보면 느닷없이 모습을 드러내는 캥거루, 왈라비와도 조우하게 된다. 12사도상이 들어선 포트 캠벨 국립공원의 기암절벽은 헬기를 타고 내려다 보면 그 짜릿한 감동이 더욱 가파르게 치솟는다.
멜버른 인근 어느 곳을 배회해도 도시로의 귀환을 반기는 것은 트램이다.
때로는 고풍스럽게, 때로는 형형색색의 표정으로 채워진 트램은 도시의 색깔을 덧씌우고 살찌우는 매개체다. 교통체증으로 트램을 없애자는 의견이 분분했을 때에도 멜버른 시민들은 고집스럽게 옛 탈 것을 지켜냈다. 그 고집스런 길이 도시의 숨통이 되고 아련한 추억이자 상징이 됐다. 새롭게 부수고 없애는 일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것을 멜버른의 트램들은 말없이 전해주고 있다.

TIP BOX

호주에서 유일, 무료로 운행되는 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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