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밝히는 불빛 燈

또 하나의 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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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중요한 것은 길 위에 있다

글. 이아름(자유기고가) / 사진. 윤상영
걷고 걷고 걷는 남자
신정일은 걷고 또 걷는다. 낙동강을 따라 아침 7시부터 밤 9시까지, 꼬박 14시간을 걷기도 했다. 64㎞가 넘는 길이다. 금강, 한강, 섬진강 등 한국의 10대 강을 도보답사한 것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의 길인 영남대로, 삼남대로, 관동대로까지 걸어 책으로 써냈다. 사라지거나 끊어진 길은 역사서와 지역 토박이들의 말을 통해 이어나갔다. 혼자 보기 아까운 길을 만나면 지자체에 알리기도 했다. 부산 오륙도에서 고성 통일전망대를 잇는 688㎞의 도보답사로 ‘해 파랑길’이 그 중 하나다. 다양한 길을 발견하고 사람들에게 알린 공로를 인정받아 2010년에는 대통령 표창도 받았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도, 쉽게 도전할 만한 일도 아니다. 김지하 시인은 그를 “삼남일대를 걷는 민족민중사상가”라고 칭했고, 김용택 시인은 “김정호의 혼이 씌인 게 틀림없다”고 말했다. 사실 그는 ‘알 만한 사람들은 모두 혀를 내두르는’ 문화사학자다. 어딜 가든 그 지역에 관련된 문장들을 줄줄 읊고, 그 일대에 얽힌 과거와 현재의 상황을 책 한 권 분량으로 뚝딱 엮어내니 말이다. 그는 어린시절부터 작가를 꿈꾸며 읽은 2만여 권의 책과 고독했던 혼자만의 시간이 그 밑천이라고 말한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왕따를 당했어요. 학교수업을 마치고 나면 집 근처 강가에서 혼자 놀곤 했지요. 외로웠지만 그 시간들이 저를 단단하게 만들었어요. 해가 저물어갈 때쯤 강을 건너며 바라본 노을은 제가 늘 그리워하는 풍경이지요. 그때부터였던 것 같아요. 길에 몸과 마음을 맡기게 된 게.”
땅의 과거와 현재를 기록해 역사에 남기는 일
굽이굽이 흐르는 이 강물이 대체 어디로 흘러가는지’ 궁금해하던 소년은 중년이 되어서야 그곳이 섬진강 발원지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 장소에 대해 알면 알수록 감상은 진하게 남았고, 걷는 일은 더욱 즐거워졌다. 자연이 주는 편안함과 위안 그 이상이었다. “길에 대해 아는 만큼 느끼는 것 역시 늘어나요. 땅에는 그곳을 지나다녔던 사람들의 일상이 서려 있으니까요. 우리가 마주하는 길목마다 5,000년 동안의 역사가 함축되어 있는 셈이지요. 길을 걷다보면 자연의 유구함에 경탄하고, 과거 이야기를 떠올리며 변화에 아쉬움을 느끼기도 해요.”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대동여지도를 중심으로 걷는 그에게 우리나라 길의 변화는 더욱 극명하게 다가온다. 그 모습을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2004)에 담았다. 200여 년 전 이중환이 전국을 돌아다니며 그 땅의 자연과 물산, 문화는 물론 당대 사람들의 정서까지 담아낸 <택리지>를 잇는 인문지리서다. 땅의 쓰임이 변하고 지역 사람들의 삶이 바뀐 지금, 신정일은 과거에 빗대어 현재를 기록했다. 한 자 한 자 적다보니 십 년간 열 권에 이르렀고, 2018년에 출간할 열한 번째 책으로 ‘택리지 시리즈’를 마무리할 예정이다.
앞에서 이끌고, 옆에서 함께 걷는 길벗
혼자 걷는 만큼 함께 걷는 시간도 좋아한다. 그가 본격적으로 사람들과 함께 걷기 시작한 것은 1985년, 향토현문화연구소를 설립하면서부터다. 우리 땅의 경치를 더 많은 사람이 알게 됐으면 하는 마음에서 출발했다. 그 마음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산천을 유람하는 것은 좋은 책을 읽는 것과 같다’는 옛말을 전하기 위해 1989년부터 문화유산 답사 프로그램 ‘길 위의 인문학’을 진행해 왔다. 알고 걸으면, 걸으며 배우면 자신만의 것이 된다는 그의 철학이 담겼다. 동화 속 피리부는 사나이처럼 매주 사람들과 함께 전국을 누비며 그 길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고, 걷기의 즐거움을 설파한다.
“우선 사람들에게 자연을 마주하게 해요. 사람들이 자연에 몸을 맡기는 방법을 생각보다 모르는 것 같더라고요. 감각을 깨우며 경치에 빠져들 수 있는 대화를 하다보면 그들의 눈빛이 점점 빛나기 시작해요. 그리고 어느 순간 저를 바라보며 꿈을 꾸는 듯한 표정을 짓곤하지요. 저를 보는 게 아니라, 각자의 생각과 감성에 빠지기 때문이에요. 이런 순간들이 개인에게 더 많아질수록 세상은 선해진다고 생각합니다.” 답사 프로그램만이 아니다. <섬진강 따라 걷기>, <영남대로>, <그곳에 자꾸만 가고 싶다> 등 70여 권의 책을 냈으니,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길벗을 자처해온 셈이다.
저마다의 풍경을 즐기고 경탄하는 삶
“사람들이 저를 보고 ‘새끼 노루가 껑충껑충 뛰는 것 같다’고 말해요. 걷는 모습이 마치 춤을 추는 것 같다나요. 이렇게 저마다 걷는 꼴이 달라요. 더 멀리 시선을 두고 걸을수록 각자 걷는 모습이 다양해질 거예요. 타인의 뒷축만 쫓아선 안 되고요.”
그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는 ‘해찰’이다. 전라도 말로, 쓸데없이 다른 짓을 한다는 뜻이다.
많은 이들이 바쁜 마음을 따라 재촉하며 걷다가 결국 그 길에서 봐야할 것을 놓치는 상황이 안타까워서다.
“도로는 정신없이 빨라요. 출발점에서 도착점으로 빠르게 이동하려다보니 풍경은 그저 스치는 찰나에 불과하지요. 하지만 걷는다는 것은 선과 선을 잇는 일이에요. 우리가 끊어진 순간 순간을 살고 있는 게 아닌지 돌아봤으면 좋겠어요.”
신정일이 가장 걷기 좋아하는 길은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오솔길이다. ‘저 모퉁이를 돌면 어떤 아름다운 풍경이 있을지’ 설렘과 희망을 품고 걷는 것이야말로 그에게 가장 큰 행복이기 때문이다. 반평생 길 위에서 희노애락의 순간을 보낸 신정일은 매주 만나는 길벗들에게 말한다. 현자(賢者)란 모든 것에 경탄하는 사람일 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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